지난번에 이야기 했듯이 올해부터 포시즌스 호텔 서울의 모든 레스토랑에선 계절별로 메뉴가 바뀌게 되었는데, 여름을 맞이해서 여름을 주제로 한 보칼리노의 새 코스 메뉴가 나왔기에 방문했었다.
항상 하는 이야기이지만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다이닝들이 어떤 한 주제를 갖고 음식을 만들 때 눈에 보이는 것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물론 소비자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경우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도 있겠지만 난 그보다 셰프들의 실력이 그만큼 안되기 때문에 자꾸 변죽을 올린다고 생각한다.
Terlano Pinot Grigio 2018
여름을 주제로 해서 그런지 짝지어진 와인들은 대체로 가벼우면서 산뜻한 느낌이 강했었다. 사실 술을 거의 마시지 못하는 수준이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 어렵긴 한데, 보칼리노에서는 와인 페어링을 새로 메뉴에 넣긴 했지만 뭐랄까, 더 잘 할 수 있는데 아끼는 듯한 뉘앙스가 강했다.
한국에서 아직 와인 페어링은 낯선 문화이긴 한데, 음식을 제대로 즐기려면 - 특히 서양식에서 - 술과의 짝짓기는 거의 필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종교적인 이유나 나처럼 신체적인 이유로 술을 못 마시는 사람들을 위해서 목테일이나 하다 못해 탄산수와 같이 먹는 것이 도움이 되는데, 아직까지는 물부터 유료로 주문하는 것이 불만인 상황에서 요원한 일이다. 그러다보니 대체로 무난하면서 - 어차피 회전율이 낮다면 굳이 업장측에선 모험 할 필요는 없을테니까 - 가격 부담도 적은 와인들 위주로 선택하게 되는데, 그것이 결국 완벽한 짝짓기를 이루지 못할 때가 많았다. 이번 와인 페어링도 그런 느낌이 아주 강했다.
Zeppola fritta con burrata e pomodoro
Potato donuts, burrata cheese, marinated tomatoes
테이스팅 메뉴 시작부터 여름이란 계절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계절을 주제로 메뉴를 구성했다면 맛의 핵심은 계절을 표현해야 하는데, 보칼리노의 치로 셰프는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코스의 모든 음식에서 신맛이 도드라졌는데, 그것이 일종의 핵심이라고 할까? 그래서 나는 치로 셰프의 모든 음식들을 정말 사랑한다. (이제는 그의 음식들을 만날 수 없게 되었지만)
Los Vascos Chardonnay 2018
Zuppa fredda d'anguria
Chilled watermelon soup, chili, goat cheese, squid in tuile, atsina cress
처음에 수박으로 만든 수프라고 설명을 들었을 때 불안했었다. 한국의 과일들은 대체로 단맛이 너무 강한 반면 신맛은 거의 없다시피 한데, 그 단맛도 자연스럽지 않아서 불쾌한 여운을 갖는 경우가 많다. 서양에서 차가운 수프가 없는 것은 아니니 온도는 문제될 것이 없었는데, 그 불쾌한 여운의 단맛 중심인 수박을 갖고 수프를 만들었다니 처음엔 치로 셰프의 아이디어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다. 여름 하면 떠오르는 과일이 한국에선 수박이니까 그냥 넣은 것은 아닐까?
그런데 그런 걱정은 기우였었다. 단맛이 분명 존재하긴 하지만 불쾌하지도 않을 뿐더러 코스 메뉴의 흐름을 방해하지도 않았다. 당연하게도 짠맛 중심이긴 한데, 거기에 신맛도 적절하게 들어가 있어서 맛의 균형이 맞을 뿐더러 주제에 맞게 계속해서 여름이란 계절을 맛으로 잘 표현하고 있었다.
Ampeleia - Costa Toscana "Kepos" 2016
Risotto di semola al pomodoro
Semolina risotto, mozzarella, tomatoes, rucola oil
다만 파스타 메뉴는 살짝 흐름을 방해하긴 했었는데, 여름이란 계절을 맛으로는 잘 표현 했었다. 다만 결이 좀 다르다고 할까? 코스가 전체적으로 습도가 낮은 한 여름 저녁의 도시, 석양을 표현했다면 이 파스타 메뉴는 좀 더 더운 느낌의 한낮을 표현한 것 같아서 흐름을 방해한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Distrito Federal
원래 이 맥주는 찰스 H. 바에서만 주문 가능하고 보칼리노의 와인 페어링 메뉴에는 없는 것인데, 소믈리에가 와인 보다 이 맥주가 좀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추천을 해서 마셨다. 제주도의 귤향이 경쾌하게 다가오는데, 맛은 시트러스류 특유의 씁쓸한 맛이 강한 편이었다.
부다페스트와 타이페이에서 이미 와인 페어링이 꼭 와인만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경험 했기에 보칼리노에서도 맥주 추천이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는데, 정말 추천 그대로 메인 메뉴였던 참치와 정말 잘 어울렸었다. 입안에 남아 있던 참치의 향과 맛을 깔끔하게 정리해준다고 할까?
Tonno Rosso Grigliato
Grilled red tuna, tomatoes and green beans salad, aged balsamic vinegar
계속해서 신맛의 개입이 도드라지는데 이게 정말 잘 어울렸었다. 메인으로써 확고하게 여름이란 계절을 잘 보여주고 있었는데, 도심속에서 한가로운 여휴를 즐기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현실은 퇴근 후 저녁 식사였는데, 느낌은 휴가를 가서 여유로운 저녁을 즐기는 그런 여운이 한편으로 아쉬우면서도 좋았었다.
Ata Rangi Pinot Noir Crimson 2017
원래 짝짓기한 와인인데 이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난 맥주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와인과의 짝짓기도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맛을 훌륭하게 표현해서 좋았는데, 그 맛이란 것을 한 장의 사진으로 남긴다면 이와 같다고 할까? 휴대 전화로만 사진을 찍다보니 느낌이 잘 살아나진 않았는데, 습도가 낮은 선선한 어느 여름 저녁날, 도심지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야외에서 즐기는 그 순간을 맛으로 제대로 표현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Pesca seiroppata
Pavlova, almond mousse, peach marmalade
그리고, 마무리로 디저트는 가장 여름이란 주제와 잘 어울렸었다. 여운을 달래준다고 할까? 시작부터 끝까지 - 물론 파스타가 살짝 거슬리긴 했지만 - 하나의 주제를 정말 잘 표현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제는 더 이상 그의 음식들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메뉴는 그대로 남아 있겠지만, 여러 차례 이 블로그에서 지적했듯이 셰프가 직접 요리를 하지 않지만 부재 여부에 따라서 조리 상태가 천차 만별이라고 했었는데, 이번에도 그런 경우가 많았었다. 게다가 이제는 공석이 된 마당에 그런 경우가 좀 더 많아지지 않을까 싶은 기우도 있다.
한편으로 오픈 초창기부터 지적했던 사항인데, 서버들의 응대 및 접객이 너무 서투르다. 어차피 한국에서 해외에서처럼 접객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계속 반복된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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